2018년 4월 2일 월요일

정보의 불균형 1: 한국어에서는 주어가 마구 생략된다! 한국어만?

  한국어로 말 할 때 주어를 많이 생략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맥락적인 언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들도 많다.

  과연 그럴까? 한국어만 이토록 맥락적이라서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다른 언어, 특히 영어는 주어 동사가 항상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보다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오해의 소지도 적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는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오판이다. 마치 외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외국 사람 몇 명밖에 만나본 적 없으면서 외국은 한국과 이러저러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며 결론을 내리는 것과 비슷하게 한국어는 전문가 수준으로 알지만 영어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상태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만으로 두 언어의 차이를 말하는 과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책으로 배워서 그런 것 같다. 사랑을 책으로 배우면 안 되듯이 영어도 책으로 배우면 영어 화자들은 주어도 생략하지 않고 언제나 full sentence로 말하는 줄 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하나도 안 들리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영어에서도 대부분 주어가 생략되기 때문에 책으로만 영어를 배운 사람 입장에서 적응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추억의 명작 Body Guard 초반 남자주인공이 어떤 노인을 경호하는 장면에서 그 경호받는 노인이 묻는다. "Hands ever shaken?" 그러자 남자배우가 대답한다. "Just adrenaline." 무슨 소리인가? 누군가의 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노인이 유능한 경호원이 손을 떨기도 하는지(무서움을 느끼는지- 필자 주) 물어보자 남자가 그저 호르몬 작용일뿐이라고(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손을 떨기도 한다고 -필자 주) 대답하는 장면이다. 남자가 실력있는 경호원으로 위기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이야기하다 장면 해석으로 말이 샜는데, 본론으로 돌아와 다시 영어 표현을 보자. 첫번째 문장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영어의 full sentence로 표현하자면 아마 'Have your hands ever shaken?'정도 될 것이고 두번재 문장은 'It's just adrenaline.'일 것이다. 보자 보자... 첫문장에서 동사와 소유격 표현이 빠졌고 두번째에서는 주어, 동사 다 빠졌다. 한국인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것을 물었다면 아마 이 정도 표현이 아니었을까? '손을 떨기도 하나요?' '흥분한 거 뿐이에요.' 모두 주어만 빠졌다.

  주어 동사 다 생략하는 것보다 주어만 생략하는 것이 그래도 더 정확한 언어 표현 아닌가. 이제부터 이렇게 이야기하자. 영어는 맥락적이다. 한국어는 정확히 표현하는 편인데... ㅎㅎㅎ

  이제 처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과연 한국어만 주어 생략하는 거 맞는가? 정답은 '아니다'이다. 이런 오해에는 한국의 국어교육의 문제점도 있다. 한국의 공교육에서 우리말로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말로 글을 써도 글에서 주어가 생략되는 일은 말할 때처럼 빈번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한국인이 익숙한 한국어의 구어체와 영어 책 속의 문어체를 서로 비교하면서 두 언어는 이렇게 달라....라고 이야기하는 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 그럼 일상적 상황에서 영어로 말을 할 때, 주어가 어떻게 생략되는 지 한 번 살펴 보자.

  첫째, 영어에서는 한 단어로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한국어는 말을 할 때도 목적어와 술어는 꼬박꼬박 써주지 않나! 예를 들어, 친구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밥 먹을래?"

  같이 먹자는 소린지 혼자 먹으라는 소린지... 해당 상황에 있지 않다면 헷갈리는 맥락적 표현이다. 주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점심을 말하는 것인지 저녁을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최소한 목적어와 동사는 등장한다.

  반면 영어로는 위 말을 어떻게 할까?

  "Lunch?"

  음하하하... 이게 무슨 소린가? 우선 저녁이 아니라 점심을 이야기하는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덜 맥락적인가? 우선 같이 먹자는 소린지 혼자 먹으라는 소린지 상황을 모르면 어리둥정하기 마련이다. 역시 밥을 먹을 계획인지를 물어보는 것인지 밥을 먹었냐는 소린지도 알 수 없다.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필자가 두 친구에게 서로를 소개시켜 줄 때, 한국어로는 아마 다음과 같이 하게 될 것 같다.

  "이 친구는 이 아무개이고 저쪽은 박 아무개야."

  영어로는 어떻게 될까?

  "Joe Public, Jane Roe. Jane Roe, Joe Public."

  이제 다시 판단해 보자. 어떤 언어가 더 맥락적인가?

  둘째, 영어에서 이렇게 주어 동사 모두 생략하고 단 몇 개의 단어로만 의사소통하는 방법 말고도 가짜 주어를 내세워 실제로 행위한 주체를 생략하는 화법도 존재한다. 이런 방법은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가짜 주어를 내세우는 방법 중 하나가 한국인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수동태 문장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영문법에서 만큼은 영어원어민을 능가하기 때문에 수동태 문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생략한다.

  Binoculars were bought simply because binoculars were bought.

  위 문장은 Lee Child라는 작가가 지은 Never Go Back이라는 추리소설에 나오는 표현이다. 형식적으로 주어와 동사가 모두 보이지만 실질적인 행위 주체는 나오지 않는다. 누가 산다는 것인가? 위 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해 보자면 '사람들이 망원경을 샀던 이유는 오직 당시 망원경이 유행했기 때문이었다.'정도 된다. 우와, 한국어에서는 영어에는 표현되지 않았던 행위 주체가 나타났다!

  이렇게 실질적 주어는 숨겨놓고 형식적으로 주어 동사 있으니까 영어는 표현이 정확하고 한국어만 맥락적이라는 주장은 사실 '저는 영어를 잘 모릅니다'라는 선언이거나 '저는 영어든 한국어든 언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없이 그냥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반복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쯤 되면 우리가 한국어의 특수성으로 즐겨 언급하는 '갸가갸가가?'라는 표현, 어떻게 두가지 소리로 그렇게 복잡한 뜻을 나타낼 수 있는지 감탄하던 그 상황이 영어에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직하다고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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