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을 읽다가 뜬금 없이 맹자의 '인' 사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한 번 읽어보시라. 다음 문장은 미국 작가 Lee Child (2001)의 Echo Burning이라는 작품 96쪽에 나오는 주인공 Reacher의 생각 중 일부이다.
...He would do it for Jodie Garber, but he wouldn't do it for Carmen Greer. Why not? Because it comes in a rush. You can't force it. It's a hot blooded thing, like a drug in your veins, and you go with it. If it's not there, you can't go with it. Simple as that. ...
이 책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가 직접 번역해 보면...
'...그는 조디 가버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지만 카멘 그리어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건 이런 제안을 갑자기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이건 피가 끓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치 약물에 취했을 때처럼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상태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간단한 차이이다. ...'
필자가 이렇게 번역하게 된 이유는 이 주인공의 생각 이전에 주인공의 대화 상대자인 카멘이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주인공의 생각에서 나오는 'it'이라는 대명사는 대부분 '살인' 행위를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번역할 때는 해당 문장의 단어만 안다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 위 아래 맥락이 무엇인지까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번역을 제 2의 창조라고도 부르고 필자는 골치아픈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 생각 이후의 장면에서 주인공이 카멘에게 그의 남편을 죽여줄 수 없다고 말하자 카멘이 항의한다. 남친이든 남편이든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를 학대한다면 그를 죽여버리겠지만 왜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느냐?라고 따지는 것이다. 카멘은 그 이유가 자신은 남미 출신이고 그의 전 여친은 백인이라서 차별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주인공이 이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 여친은 잘 알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카멘이 주인공에게 남편살해를 부탁하는 시점이 아직 주인공에게 카멘이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만나지 몇시간되지 않았을 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라는 조언도 주인공은 덧붙인다.
자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의 대화와 주인공의 생각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필자도 당황스럽게 어떻게 보면 가장 '인'스럽지 못한 상황, '살인'에 대한 대화 속에서 맹자의 '인' 사상을 떠올렸는지 아연하다. 그것은 아마도 필자가 인을 떠올릴 때면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이야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그 짠한 마음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고 했던 그 말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학대 당하는 여성이 자신의 전 여자친구라면 그 남자를 죽이겠지만 방금 만난 카멘의 남편인 경우 그를 죽일 수 없다는 주인공 리처의 생각이 맹자의 인을 떠올리는 데 그렇게 낯선 장면도 아닌 것 같다.
맹자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제후 재선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데 소가 울면서 끌려가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제후가 우는 소를 가여히 여겨 소를 끌고 가는 일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한다. 그러자 그 일꾼이 지금 만들던 종이 완성되어 그 마무리를 하려면 소피를 발라야 하기 때문에 소를 끌고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제후가 그 소는 살려주고 양의 피로 종을 마무리하라며 일꾼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대화를 듣고 맹자가 제후에게 물었다 한다. '왕께서는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제후가 대답하기를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말을 해 놓고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해 맹자가 한 말이 바로 '인'이라는 것이다. 자기 눈 앞에서 울며 죽어가는 짐승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바로 '인'심이라서 자기 눈 앞에는 보이지 않는 동물의 목숨으로 대신한 것이라고!
어떤가? 내 눈 앞의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내가 아는 사람의 불행은 살인을 해서라도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마음!? 비슷하지 않은가??
일견 이런 마음은 비 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눈 앞에 있는 것에만 급급해서 제도 전체를 고쳐 더 이상 학대받는 여성이 나오지 않고 동물도 죽이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비판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런 정치제도에 초점을 둔 입장은 또 다시 네 앞의 일이나 잘 처리하고 그런 말을 하라는 입장으로 대립점을 구축할 수 있다.
이런 점이야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동양의 특수성이라고 귀가 닳도록 들어오던 유교사상의 핵심, '인' 사상을 서구의 대중 소설에게 보게 되다니 필자는 감회가 새롭다 아니 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맹자의 인 사상으로 대표되는 유교 사상은 동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인간의 심리, 윤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선 한 번 읽어보시라. 다음 문장은 미국 작가 Lee Child (2001)의 Echo Burning이라는 작품 96쪽에 나오는 주인공 Reacher의 생각 중 일부이다.
...He would do it for Jodie Garber, but he wouldn't do it for Carmen Greer. Why not? Because it comes in a rush. You can't force it. It's a hot blooded thing, like a drug in your veins, and you go with it. If it's not there, you can't go with it. Simple as that. ...
이 책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가 직접 번역해 보면...
'...그는 조디 가버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지만 카멘 그리어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건 이런 제안을 갑자기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이건 피가 끓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치 약물에 취했을 때처럼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상태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간단한 차이이다. ...'
필자가 이렇게 번역하게 된 이유는 이 주인공의 생각 이전에 주인공의 대화 상대자인 카멘이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주인공의 생각에서 나오는 'it'이라는 대명사는 대부분 '살인' 행위를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번역할 때는 해당 문장의 단어만 안다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 위 아래 맥락이 무엇인지까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번역을 제 2의 창조라고도 부르고 필자는 골치아픈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 생각 이후의 장면에서 주인공이 카멘에게 그의 남편을 죽여줄 수 없다고 말하자 카멘이 항의한다. 남친이든 남편이든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를 학대한다면 그를 죽여버리겠지만 왜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느냐?라고 따지는 것이다. 카멘은 그 이유가 자신은 남미 출신이고 그의 전 여친은 백인이라서 차별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주인공이 이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 여친은 잘 알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카멘이 주인공에게 남편살해를 부탁하는 시점이 아직 주인공에게 카멘이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만나지 몇시간되지 않았을 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라는 조언도 주인공은 덧붙인다.
자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의 대화와 주인공의 생각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필자도 당황스럽게 어떻게 보면 가장 '인'스럽지 못한 상황, '살인'에 대한 대화 속에서 맹자의 '인' 사상을 떠올렸는지 아연하다. 그것은 아마도 필자가 인을 떠올릴 때면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이야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그 짠한 마음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고 했던 그 말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학대 당하는 여성이 자신의 전 여자친구라면 그 남자를 죽이겠지만 방금 만난 카멘의 남편인 경우 그를 죽일 수 없다는 주인공 리처의 생각이 맹자의 인을 떠올리는 데 그렇게 낯선 장면도 아닌 것 같다.
맹자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제후 재선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데 소가 울면서 끌려가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제후가 우는 소를 가여히 여겨 소를 끌고 가는 일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한다. 그러자 그 일꾼이 지금 만들던 종이 완성되어 그 마무리를 하려면 소피를 발라야 하기 때문에 소를 끌고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제후가 그 소는 살려주고 양의 피로 종을 마무리하라며 일꾼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대화를 듣고 맹자가 제후에게 물었다 한다. '왕께서는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제후가 대답하기를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말을 해 놓고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해 맹자가 한 말이 바로 '인'이라는 것이다. 자기 눈 앞에서 울며 죽어가는 짐승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바로 '인'심이라서 자기 눈 앞에는 보이지 않는 동물의 목숨으로 대신한 것이라고!
어떤가? 내 눈 앞의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내가 아는 사람의 불행은 살인을 해서라도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마음!? 비슷하지 않은가??
일견 이런 마음은 비 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눈 앞에 있는 것에만 급급해서 제도 전체를 고쳐 더 이상 학대받는 여성이 나오지 않고 동물도 죽이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비판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런 정치제도에 초점을 둔 입장은 또 다시 네 앞의 일이나 잘 처리하고 그런 말을 하라는 입장으로 대립점을 구축할 수 있다.
이런 점이야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동양의 특수성이라고 귀가 닳도록 들어오던 유교사상의 핵심, '인' 사상을 서구의 대중 소설에게 보게 되다니 필자는 감회가 새롭다 아니 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맹자의 인 사상으로 대표되는 유교 사상은 동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인간의 심리, 윤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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